국민이 무식해서 이뤄진 대선 결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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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시키고 양분 시키는
이 강남 부동산은 누구에 의해 시작
되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부동산 투기 바람은 강남 개발로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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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이 세계최고 땅값에 50%기여” |
이정우 경북대 교수 “박정희가 토지정의 무너뜨렸다… 불소소득이 근로소득 대비 2.5배” |
[0호] 2012년 10월 06일 (토) | 조수경 기자 jsk@mediatoday.co.kr |
서울 강남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덕에 아마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지만 강남은 이미 그 전부터 세계 최고의 땅값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이 지금과 같은 빌딩숲으로 바뀌고 '헉' 소리 나올 만큼 비싼 땅값의 대명사로 떠오른 게 만든 이는 누구일까.
강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땅값이 지금과 같은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치솟게 만든 일등공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최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캠프에 합류한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5일 토지+자유연구소 공개 강연에서 "우리나라 땅값이 세계 최고인데 역대 대통령을 상대로 땅값 상승 기여도를 계산해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5%로 딱 절반이었다"며 "박정희 정부가 토지 정의를 무너뜨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가 역대 정권의 초기 전국 지가총액과 말기 전국 지가총액을 바탕으로 연평균 지가 상승률을 산출한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33.1%로 가장 높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21.6%, 노태우 전 대통령이 17.7%, 전두환 전 대통령이 14.9% 순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치솟은 땅값으로 토지를 소유했던 극소수 부자들이 얻은 이익도 어마어마했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생산소득 대비 불로소득의 비율은 무려 248.8%다.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은 100이라고 봤을 때 땅값 상승으로 얻은 소득이 이보다 2.5배 가량 많았다는 의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96.3%, 전두환 전 대통령이 67.9%, 이승만 전 대통령이 43.2%임을 감안할 때 매우 압도적인 수치인 셈이다. 이 교수는 "당시 대한민국은 불로소득의 천국이고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었느냐"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굉장히 큰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 역대 정권하의 지가 상승(단위: 조, % /자료출처=이정우 교수) | ||
이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했다고 박수 받지만 그 뒷감당은 누가 해야 하느냐"며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경제운용이었다. 투기 규제 정책을 엄격하게 세우면서 개발을 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인사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재무부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낸 남덕우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토지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정책을 추진한 결과 부동산 투기와 땅값 상승이 언제나 정부를 괴롭혔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토지정책을 확립했어야 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 교수는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의 요직에 있었던 송정목씨가 <서울 도시계획이야기>란 책에서 '박정희 정권에서 강남 지역의 투기를 조장했고 이를 통해 1년에 3배 이상의 돈을 불리는 등 막대한 이익을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가져갔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역대 정권 하의 물가 상승(%, 자료출처=이정우 교수) | ||
연평균 9.1%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내려진 '독재는 잘못했지만 경제성장은 했다'라는 평가를 이 교수가 통계적 수치로 반박한 셈이다.
최근 대선 화두로 경제민주화가 떠올랐지만 토지 문제는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 정책실장 출신인 이 교수는 "토지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토지 정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며 "이 고통을 누가 벗어나게 할 것인지, 경제 민주화의 중요한 주제임에도 일시적으로 잊혀진 주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강연 말미 토지 정의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역사적 인물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와 조선시대의 조광조를 들며 토지 정의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에둘러 지적했다. 호민관이었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토지 소유의 제한과 재분배, 자작농의 창설을 꾀하려다 귀족들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곡물법과 토지법 등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조선 시대의 개혁가 조광조 역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유자광 등 훈구파들에게 집중된 토지 소유에 문제제기하다 개혁정책에 반발한 훈구파의 모략으로 결국 죽임을 당했다.
박정희와 박태준. 자료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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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평 강남 땅 투기로 박정희 비자금
(서울시 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을 역임한 손정목씨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중에서)
김종필,이후락 그리고 박종규였다. 김종필은 대권을 향한 욕심이 있었고,이후락은 실권자이기 위한 노력이나 공작등이 있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오직 대통령 한 분에 대한 충성이 있을뿐이었다. 아무튼 다른 야심이 없었던 만큼 그 권력은 더욱 큰 것으로 비쳐졌다. 박종규 앞에서는 모든 장관이 바짝 긴장을 했다. 언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종규는 1930년생이었으니 1929년생인 윤진우(서울시 도시계획과장)보다 나이는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인간의 그릇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박 실장은 실질적인 제2인자였으니 윤진우가 긴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윤진우 과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먼저 그 집(박종규의 집)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던 호랑이 표범 가죽,박제가 된 큰 악어 등이었다. 아마 외국을 다녀온 고관들이 귀국할때 갖고와서 선물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응접실 창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정면에 한강이 있었고 그 대안인 압구정동에 현대건설에서 시행하고 있던 매립공사 장면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고 한다.
박종규 실장의 질문은 간단 명료했다. 헬리콥터로 돌아본 지역(과천-서초-강남-잠실)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것이었다.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날 강남구가 된 일대의 지역이 가장 유망한 것 같다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그쪽 땅을 사모으지" 라고 했다.
그리고 약 2주일이 지난 후,윤 과장이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때 시장실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실에 가면 돈을 줄 테니 받아와서 우선 그 돈으로 땅을 사모으라"는 것이었다.
(중략)
"높은 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땅을 사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되팔아서 갖다 바친다. 이 사실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매우 높은 분 한둘과 김현옥 서울시장 그리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사항이다"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의 그의(윤진우) 흥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 3.4 공화국시대의 청와대의 권한, 그것은 바로 생사여탈을 자유자재로 하는 절대권력이었다. 윤진우는 '그 어른에게 잘 보이면 출세길이 훤하게 뚫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중략)
이 일을 윤진우에게 하명한 박종규 경호실장, 김현옥 서울시장은 성격이 치밀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윤진우는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패가망신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식 장부는 만들지 않았지만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메모로 남겼다. 그 메모를 정리하면 자금의 흐름을 어느 정도까지 재현할 수 있다. 다만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것을 재현해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1970년 5월 20일 현재로 그가(윤진우) 청와대 정치자금분으로 매입한 토지가 23만 7,366평, 동원된 토지대금이 12억 7,088만 5,250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메모를 통하여 그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도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다.
자금회전 등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윤진우에게는 신바람이 나는 나날이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돈을 풍족하게 쓸 수 있었다. 토지매입 자금 중 3%는 판공비로 쓰도록 지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구입하게 되면 사전에 양해된 사람 명의로등기이전도 해야하고 또 땅을 매각할 때도 소유권 이전에 따른 제반 수수료 등 경비가 들게 마련이었다. 뒤에서 설명하는 상공부 자금을 합하여 1970년 상반기에 그가 썼던 자금의 총액수는 20억 원을 훨씬 넘었다. 20억 원의 3%는 6천만 원이다.
1970년 하반기에 서울시가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분양했을 때의 평당 가격 평균이 14만2천 원, 40평짜리가 571만 2천 원이었다. 현대.대림.동아건설 등 큰 건설회사가 중앙정보나 서울시 국장들에게 연말과 추석에 돌리는 떡값이 겨우 10만 원짜리 수표 한두 장이었으니 6천만 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물론 그 중에 상당한 액수가 필요경비로 쓰였지만 떨어지는 금액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 신나는 일은 승진이었다. 경북지사로 있던 양태식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것은1970년 4월 16일이었다. 양 시장 부임 2주일 후인 5월 2일에 윤진우는 도시계획국장으로승진 발령되었다. 즉 토지매입.매각으로 고생하고 있던 중간에 과장에서 국장이 되었으니 신바람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략)
오해를 할까 두려워 여기서 이 사건의 본질을 밝히고 넘어가야 하겠다. 이 강남 토지투기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좀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락 비서실장이 관여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마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에게 맡겨둔 적금통장에서 최초의 자금이 나왔으니 이후락 실장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김정렴 상공부장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은 1969년 10월 21일이었다. 김 비서실장은 취임 직후에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아마 박종규 경호실장이 매사에 치밀한 김 실장에게 이 일의 처리를 부탁했고 소심했던 김 실장이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일 처리 자체가 김 실장 몫이 되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치자금이 조성되어 그것이 대통령에게 바쳐진 마지막 단계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시대 즉 제3.4공화국 당시에도 정치자금은 여러 경로로 수합되었다. 다만 박 대통령은 기업가로부터 직접 상납을 받지는 않았다. 돈에 대해서 결벽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3.4공화국 시대의 정치자금은 주로 공화당 재정위원장,경제기획원 장관,서울특별시장(김현옥,구자춘) 등이 마련했고 연말과 추석때 대기업에서 가져간 정치자금은 반드시 비서실장을.경호실장을 경유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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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도시계획국장 손정목씨 개발비화 책 펴내
'朴대통령 워커힐 나들이 위해서 청계고가 세워"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인 손정목(75.전 서울시립대 교수)씨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의 '증언'을 담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刊. 전 5권)를 냈다.
서울시의 모습이 가장 달라진 시기는 1966년 김현옥 시장부터 양택식, 구자춘 시장을 거친 1980년까지의 15년간. 저자는 19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22년간 중앙도시계획위원을 각각 지내면서 각종 도시계획에 참여, 겪거나 알게된 갖가지 '비화'를 가감없이 공개했다.
저자는 "서울 도시계획에 대해 최종적으로 한명이 책임져야 한다면 바로 나"라면서 "도시계획이 잘됐다 못됐다의 가치 판단을 떠나 있었던 일과 알고있었던 일을 관련자들이 살아있을 때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강남개발 = 1966년 제3한강교 건설(現 한남대교)이 강남개발의 첫 단추였다. 강남개발은 단순 인구과밀의 억제책이 아니라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6.25 당시 서울시민이 피난가지 못했던 상황의 재연을 피하고자 시작됐다.
여기에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주변 영동지역에 400만평이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적되며 허허벌판이던 강남개발이 탄력을 받는다. 실무 책임자였던 윤진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이면에서 박종규, 김종필, 김정렴 등의 배후지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강남개발과 부동산투기를 동시에 벌이는 악역을 맡았다.
고속도로 건설에서는 땅값을 안들이려 구획정리사업의 명목으로 땅을 강제로 기부받는 방식으로 빼앗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땅값으로 들어간 비용은 500만원에 불과했다.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강남 토지투기 =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는 서울시 실무과장에게 과천.서초.강남.잠실 가운데 가장 투자가치가 큰 지역을 꼽을 것을 지시했고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라는 답을 듣고 그 땅을 사모았다. 토지매입은 1970년 2월부터 시작됐다. 자금이 실무과장에게 공급돼 그가 사고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방식이었다. 이후 영동 제2지구, 남서울 개발계획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 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선에 대비해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청계천 복원과 관련, "청계고가 건설 당시 시멘트는 많았지만 철강이 모자라 적게 쓴 탓에 수명이 다됐고 이를 해체하는 것에 겸해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은 잘하는 일로 본다"며 "복개한지 무척 오래됐는데 지금쯤 그 밑이 어떻게 됐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3-08-18)
*손정목: 1928년 경북 경주 출생,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역임, 1977년부터 1994년까지 서울 시립대 교수,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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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학군'으로 상징되는 입시 과열 현상
강남 8학군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나?
강남
한명회·박정희·이명박, 특별히 사랑했노라
오마이뉴스 | 입력2010.11.23 10:17 | 수정2010.11.23 14:47
[오마이뉴스 김준희 기자]
올해는 부동산의 강남불패 신화를 탄생시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아파트가 처음 분양된 지 35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0년대에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탄생하면서 강남 특권층, 부동산투기, 8학군 및 위장전입 등 여러 사회문제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강남 땅 사면 부자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유사시 대피'가 아닌 투기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강남 개발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강남 지역을 '영동'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개발 초기에는 신축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시민들이 강남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강남은 학교도 유흥가도 없는 시쳇말로 '깡촌'이었으니까. 그래서 정부에서는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등에 유흥시설 신규허가 및 이전을 불허하는 정책을 발표한다. 강북의 유흥업소들이 대거 강남으로 내려왔고 강남에 유흥가가 조성됐다.
동시에 강남의 땅을 사서 그곳에 건축물을 지으면 나중에 그 건물을 팔아도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도 내놓았다. 기형적인 주택투기의 뿌리, '강남불패' 신화도 바로 이때 함께 형성된다.
그 강남불패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다. 7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과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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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일대에는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배밭과 과수원이 많았다. 197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배밭을 밀어버리고 대규모의 공사를 시작했다. 봄이면 배꽃이 만발하던 곳에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강남 특권층'도 이때 함께 탄생한다. 1978년, 현대그룹 계열사인 ㈜한국도시개발은 압구정동에 사원용 아파트 900채를 지어서 그 중 600채를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특혜로 분양하는 불법을 저지른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의원도 관계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특혜로 분양을 받아서 현대아파트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국회의원,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런 고위층들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모이면서 '강남 특권층'을 형성한 것이다.
강남 8학군도 이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고급 신축아파트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학교가 없으면 학부모들은 그 지역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강북에 있는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내놓는다. 강남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는 기존의 명문고를 옮기는 것이 강남부자들에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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