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 / '혼불' 중에서
수심(愁心)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가을은 나그네가 먼저 듣는다 하고, 가을바람에 마음 놀란 나그네, 아득히 처자를 그려 편지를 쓴다 하는 이런 밤에는, 굳이 나그네가 아니어도 잠들기란 어려울 것이다. 잎 지는 소리가 깨워놓은 수심을 재우려고, 외로운 베개를 돋우 괴고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버스럭, 버스럭, 마른 낙엽처럼 가슴에 부셔질 때, 달이나 보자하고 홀연 영창을 열면, 아아, 언제 저토록 서리가 내렸는가, 순간 놀라게 한다. 마루와 댓돌과 뜰에, 시리도록 싸늘히 깔린 달빛의 희고도 푸른 서슬은 영락없는 서리여서, 몇 번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밟으면 검은 발자국 묻어 날 것 같아 차마 밟지 못하고 멀리 눈을 들면, 기러기 울음 흐르는 하늘에 달 하나, 서리 빗긴 상월(霜月)이 처연히 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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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님의 댓글
혼불!
생주이멸하는 것 중에 가장 순도 높고 아름다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