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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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경이외에도 예수에 대해서 그의 행적을 증거하는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상하리 만치 예수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예수에 관한 언급은 그것이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만 약 "요세푸스"의 예수에 관한 언급이 위조되지 않은 사실이라 주장한다면 곧 다음과 같은 질문에 성실히 답해야할 것이다.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동시대 역사 학자들의 저서에 예수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는 없다.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 할 만한 그 어떠한 고고학적유물이나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예 를들어,유대인 역사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유대땅을 두번이나 여행했던 필로 (Philo of Alexandria. BC 20~AD 50)는,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쎄네" 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없다는 것이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고,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때에는 모인 남자만 하더라도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수만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어째서 기록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저스투스 (Justus of Tiberia), 노인 플리니 (Pliny the Elder)등, 그 외 수십명의 예수와 동시대의 유대인 저술가 들이 있는데 모두 예수에 관한 언급은 하지않고 있다.
현재 빌라도나 헤롯등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은 복수적 자료에 기록되어 예수에 비해 풍부히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현재까지 예수에 관한 논문들은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들이 예수에 관해 인용한 자료들은 거의다 성서의 내용들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매우 공격적인 예수 연구가 진행되어 19세기에는 성경속의 예수에 대한 기록중 사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구별하기에 이른다.
이정도의 파격이면 중세에는 화형을 당할 만한 내용이다. 그리고 성서 외의 객관적 자료를 통하여 예수의 실존 여부를 확인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 가이사아구스도의 호적조사는AD6년에 있었으며, 예수탄생시기에 호적조사는 없었다고 로마의 역사로 밝혀졌다.
즉, 예수탄생시기에는 호구조사가 없었으며, 단지 호적조사 때문에 만삭이된 아내까지 그토록 먼거리에 있는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베들레헴이 바로 다윗의 탄생지였기 때문에 그의 혈통을 강조하기위해서 조작되어진것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요셉과 마리아가 호구조사를 받으러 갈 때에 시라아 총독이 퀴리노(=구레뇨)라고 루가복음에 나와 있는데 헤롯대왕 시대에는 시리아 총독으로 퀴리노라는 사람이 존재한 사실이 없다.
역 사 기록에 의하면(요셉푸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것이 A. D. 6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예수의 탄생을 B. C. 6-4년경으로 보는데, 이 때는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때보다 거의 10여 전이 된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장:1-2절의 말씀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호구조사가 행해지면 모든 남성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가장 혼자만이 보고를 했으며,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아내나, 혹은 다른 피부양인들이 그와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도 더 남쪽으로 6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편벽한 곳이다. 저 북방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그야말로 험준한 광야의 천리길이다.
그런데, 단지 호적조사 때문에 만삭이된 아내까지 그토록 먼거리에 있는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나야만 했을까?
왜 북방 갈릴리 사람인 예수가 저 남방 유대아 광야의 베들레헹에서 나야만 했을까?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저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것은 예수가 단지 역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 땅에 보내여졌고. 천국의 도래를 외쳤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으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하는 신념의 선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선포의 논리로써 기술된 것이 바로 복음서인 것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유는 이러한 케리그마적 사건 속에서 명백해진다. 베들레헴은 바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왕의 고향인 것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양떼를 지키는 목동이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혈통의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마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을 선지자 "미가"의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 2:6, 미가5:2)>>
셋째로, 헤롯대왕 당시 예수탄생시기의 유아학살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는 BC4년에 죽었다.
신약(마2:16)에는 헤롯대왕이 예수탄생시기에 유아학살을 자행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헤롯대왕은 아랍계와 이스라엘인의 혼혈로 로마의 지지를 받아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신전과 경기장등 각종 건축을 행하였으나 바리세인들과 이스라엘민족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성서에서 유아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는 헤롯왕은 바로 헤롯대왕이다. 그러나, 헤롯대왕의 유아학살은 역사적으로 전혀 기록되지 않은 사실무근이며(헤롯대왕은 자신의 출생과, 로마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에 콤플렉스에 빠져서) 유대민족에게 환심을 사려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을 시작(BC19년)한 그가 유아학살을 자행했을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마태 기자가 왜 베들레헴에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해야만 햇을까?
모세가 태어날 때 이집트의 파라오에 의해서 유대인의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모방했던 것이고, 예수를 모세처럼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켜줄 구세주, 즉 예수를 제2의 모세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중 히브리인 가정의 어린아이들이 파라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출1:15]를 원용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이집트 십장을 죽이고 파라오를 피해 피신하는 것과 같이[출2:12] 예수도 헤롯 왕을 피해 피신을 가도록 한 것이다.
참고;
BC 4년에 헤롯이 죽자 이스라엘은 헤롯의 아들들인 헤롯 아켈라오, 헤롯 빌립, 헤롯 안디바가 이스라엘땅을 분할 통치하였으며, 그후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와 헤롯 아그립바 2세가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태복음 2장 22절] 이 구절에서 알수 있듯이 유아학살을 자행한 왕은 헤롯 아켈라오(=헤롯 아르켈라우스)의 아버지인 헤롯대왕인 것을 알수 있다.
넷째로, 예수의 출생지로 알려진 나자렛이라는 지명은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지명이었다.
고 고학적으로 아무리 발굴 해도 예수 당시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히브리 문헌과 랍비의 저작물에도 그런 지명은 나온적이 없다. 나자렛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우수운 사실은 오늘날 성지로 불리워지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로마제국시대 예수가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기원후 3세기쯤에 갑자기 만들어진 지명이다.
다섯째, 끝으로 하나더 결정적으로 첨부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 한 마지막 말중 하나라 주장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막15:34)"란 말은 원래 구약(복음서 기자들은 기원전에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을 참조했을 것이다) 시편 22:1에 나오는 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아람어 버젼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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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서의 예수는 허구"라는 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가 있던 없던 상관없이 복음서 속의 예수는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삼년간 머물면서 기획한 유대인의 새로운 "메시아(그리스도) 예수"이고 그의 글을 접한 복음서 기자들이 70인역 구약을 원용하고,
당 시 도시를 떠돌며 진리를 선포했던 견유학파의 현자의 모습과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세계적 종교의 위상을 누렸던 "미트라"의 핵심인 고난, 죽음, 부활의 테마를 차용하여 "예수 이야기"의 뼈대를 구성하고 살을 입혀 완성한 각본에 의한 유대인의 "관음보살"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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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나사렛 예수 라는 그 나사렛 동네란 것이 1세기에는 포도밭과 로마식 원형경기장 구조물 (대형 돌계단들과 15 미터 짜리 돌답 3개)이었다는 출토가 수년전 나왔다. 2009년 이스라엘 고고학청은 1세기에 나사렛이란 사람거주지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공식화했다.
나사렛에서 자랐고 나사렛은 유태회당까지 있는 번듯한 고을이었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서 내용이다. 헌데 그것이 완전 틀리다는 고고학 증거가 현대에 와서야 나온 것이다. 나사렛 동네가 성립되지 않으면 거기에서 자랐다는 기초 시나리오 자체가 허구가 되고만다.
http://blog.hani.co.kr/freedomhome/2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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