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일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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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정도 토론을 신청하셨는데, 묵묵부답으로 대했던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반기련에서 글을 올리는 것은 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적이 제가 생각하는 기대치에 얼마나 부합되었는지 알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이트에 가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쉽게 일지 않았습니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이러한 저의 입장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것은, 님이 제게 가지신 몇몇 오해들,
즉, 님이 여성이라고 해서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점과
즉, 또한 토론할 의사가 전혀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복음은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두 가지의 신학적인 메시지의 구별이 있습니다.
님이 제게 가지신 오해든 아니면, 기독교 전반에 가지신 오해든 그것을 제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피력하기 위해서 글들을 쓰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쓰는 제 자신도 지금 집중해서 쓰니, 중구난방으로 글을 쓸 것 같지 않으며 지금 제가 쓰는 모든
글들은 이유가 있어 쓰는 것이니 제가 전하고자 하는 문맥과 완전히 동떨어져 쓰고 있지 않음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각설하고,
신학적 용어를 드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소 신학적인 용어를 드는 이유는 그것이 헬라어 형용사적 용어인지라, 즉 이국어 인지라
우리에게 명사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점때문에 이 두 용어를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 두 용어를 사용을 합니다.
즉, 복음은 "케리그마"(선포적)와 "디다케(윤리적)"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다케는 케리그마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윤리와 기독교의 윤리가 다른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그의 대부분의 서신서에서 신자들에게 윤리적으로 행할 그 이유와 근거를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먼저 이야기한 다음
즉, 많은 경우를 "그러므로"란 접속사를 사용한 다음, 신자에게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고
그 이유와 근거들을 먼저 제시하고 신자들의 윤리적 삶을 종용합니다.
님의 질문은 동성애와 관련된 것, 그리고 성경에 여성을 비하하는 구절에 대한 것으로, 즉 두가지로
압축되어 보입니다.
님의 질문들 중에는 아직도 신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 관련된 이슈로써
여성의 목사 안수가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많은 논문들이 지금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에는 몇몇 맹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을 어느 때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어느 때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며, 만약 이렇게도 저렇게도 받아들여진다면,
즉 전혀 일관성이 없다면, 성경을 어떻게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들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점은 일부 기독교를 안티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의 아킬레스 건을 자신들이 건드린 것처럼 자만하는
경우도 가끔 봅니다.
같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기독교의 어느 종파는 이렇게 가르치며 다른 종파는 저렇게 가르칩니다.
심지어 같은 종파로 할지라도 어떤 목사는 이렇게 다른 목사는 저렇게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신학자도 예외일 수 없겠지요?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것이 성경의 무오성과
오류성을 반증하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나 해보는데,
솔직히 말하면 문제들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는 이유는 "디다케"보다는, "케리그마"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감명깊게 읽고 받아들였습
니다. 그러나 실제로 간디는 케리그마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간디에게 있어 기독교의 윤리적 지침은 범종교로써의 한 부분의 가르침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빼면 결코 설명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명확한 선을 나누기에는 좀 애매하지만, 님이 제기하신 성경에서 동성애와 여성비하에 관한 것은
케리그마에 속하는 것이기보다는 디다케와 좀 더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로 동성애와 관련해서 구약 레위기에서 중요한 금기 사항으로 나오고 신약의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의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즉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의 타락성을 일부 보이기 위해 동성애에 대해
언급을 하였습니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의 일종인지 아니면 지극히 자연스런 성적인 기울이짐인지는 님이 저에게 남겨놓으신
링크로 걸어놓으신 관련된 글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저런 말들이 있는, 확실히 논란이 많은
점이라는 것은 공감이 됩니다.
저의 입장은 동성애는 자연 정신질환으로 보는 것입니다만, 혹시나 다른 가능성을 열어보인다고 해도
즉, 자연스런 성적지향으로 열어보인다고 해도, 아마도 제 편에서는 그렇게 "보이는"이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비하와 관련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은 여성과 남성을 일정한 질서를 위해 구분할 뿐이지, 차등을 전혀 두지 않습니다.
여성을 남성을 위해 보필하는 입장에서 창조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의 우열성을 전제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님이 제게 단 창세기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너는 남자를 지배하려고 하지만, 남자가 너를 지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여성의 비하 발언이 곳곳에 등장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의 서신에도 이러한 것이 발견되며, 구약의 오경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관점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더욱더 얽혀만 가서, 남자 중심의 족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브라함이 그의 처(누이)를 누이라 속인것이 애굽의 바로와 가나안의 아비멜렉에게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전철을 밟습니다.
이 문제들의 핵심을 푸는 열쇠는 질서의 측면과 역사적 상황적 측면입니다.
이 두개의 요소를 가지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위에 쓴 글보다 더더욱 많은 지면이 필요해 보입니다.
의문을 풀기위해서 논리로 풀어헤치자면, 이러한 논리의 전개가 이해를 돕기보다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더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선포적 의미로써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가
하신 일, 즉 사역에 대한 이해의 견실한 뿌리가 없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그리스도를 체험한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방자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참되게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한 회심만이,
이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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